[이동훈 칼럼] 누가 자꾸 사이렌을 불러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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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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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현한 미국의 고물가는
과다 차입해 무차별 살포한
코로나 팬데믹 지원금이 원인

나랏빚 급증한 한국의 서민은
식품 인플레로 더 큰 고통 겪어
한은은 통화정책 새판 짜야

25만원 지원금 밀어붙이는
민주당은 민생 안정 첫 조건이
물가 안정임을 깨달아야

인플레이션에 망령(亡靈)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종종 따라붙는다. 인플레 퇴치가 쉽지 않은데다 한 번 걸려들면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부의장을 지낸 프린스턴 대학 앨런 블라인더 교수의 저서 ‘중앙은행의 이론과 실제’는 인플레 망령을 그리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바다 요정 사이렌에 비유해 유명해졌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환하던 영웅 오디세우스는 부하 선원들에게 자신의 팔다리를 돛대에 묶으라고 지시하는데 사이렌의 매혹적인 노래에 유혹돼 죽음의 길로 빠져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물가안정목표제를 통해 중장기 물가를 적정한 수준에 묶어두는 것도 인플레 망령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 시기 공급망 사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후유증이었던 고물가가 잠잠해지는 듯 싶더니 최근 다시 기승을 부리는 걸 보면 망령 퇴치가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그동안 10차례 기준금리 인상 랠리를 단행했던 미 연준이 곤혹스런 지경에 빠져 있다. 지난 3월 개인소비지출(PCE) 가격지수가 예상치를 웃도는 등 물가안정 목표치인 2%에서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애초 올해 3차례 기준 금리 인하를 예상했지만 연말까지 아예 한차례 인하도 없을 수 있다고 본다.

요즘 미국 경제학자들의 최대 관심도 인플레 망령이 다시 살아난 원인 규명에 쏠려 있다고 한다. 마침 국제통화기금(IMF)이 보고서에서 장기적인 재정 지속 가능성과 일치하지 않는 과도한 차입, 즉 현금으로 살포한 코로나 재난지원금이 지속적인 고물가의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재정이 인플레율 상승에 미치는 비율을 50%로 끌어올리면서 중앙은행의 긴축 정책에 어깃장을 놓았다고 꼬집었다.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빗대면 미 정부가 본의 아니게 사이렌의 부역자가 된 셈이다.

나랏빚이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50%를 넘은 한국도 IMF 보고서의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미국발 고환율과 중동발 고유가에 식품 가격 인플레까지 가세하면서 미국보다 상황이 좋지 못하다. 미 연준의 금리 인하만 기다리던 한국은행은 판을 다시 짜야할 처지다. 최근 이창용 한은 총재는 4월 통화정책 방향 회의 때만 해도 미국이 하반기 금리 인하를 개시할 것이라는 전제로 통화정책을 수립했지만, 앞으로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게다가 근심거리가 더 추가됐다. 영수회담에서 합의가 불발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추진이 강행될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이 대표는 지난 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물가 걱정을 해서 경제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런 정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며 소비쿠폰 발행 등을 통한 정책 재추진 뜻을 밝혔다. 민주당은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민생지원금 지급을 추진하면서 행정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직접 효력이 생기도록 하는 이른바 ‘처분적 법률’ 활용도 불사한다는 계획이다. 이쯤 되면 한은과 정부의 통화·재정정책은 개의치 않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더구나 1분기 경제 성장률이 예상치(0.5~0.6%)를 깬 1.3%라는 호실적을 보인 마당에 13조원을 풀어 소비를 부추기는 건 섶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민들은 당장 풀린 지원금이 달콤할 순 있어도 나중에 고물가 부메랑에 골병이 들 게 뻔하다. 몇 발짝 양보해 야당 대표로서 민생 안정이 우선인 점은 이해한다 해도 돈 푸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이다.

이 대표가 현금 살포에 집착하는 건 성남시장과 경기지사 시절 지역 화폐를 활용해 인기를 누렸던 과거의 좋은 기억에 사로잡힌 때문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당시는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소비자물가라는 거시지표에 미칠 영향보다는 당장 지역 소비 활성화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젠 영수회담을 통해 대통령의 카운터파트로서 위상이 강화된 만큼 격에 맞게 민생 안정의 첫 조건이 물가 안정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쁜 사람들이 고의로 저지른 범죄보다 잘못된 논리에 빠진 이들이 본의 아니게 저지르는 범죄가 더 무섭다.” 경제학계 명언으로 통하는 통화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의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소감이다. 포퓰리스트임을 자처하는 이 대표가 전자도 후자도 아닌, 앞으로 올바른 민생 정책을 지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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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하면 어렵다고들 합니다. 낱말을 어렵게 만들어 독점하려는 일제 잔재 때문입니다. 금융이 쉬워져야 비로소 서민금융이 설 자리가 생깁니다. 독자 눈높이에서 금융 현안을 짚어가는 따뜻한 금융기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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